화장실은 아름다워야 하는가?
화장실이라는 말을 떠올리면 기분이 그리 유쾌하지 않다. 그것은 그 공간의 목적이 배설이라는 인간의 은밀함과 연관되어 있고, 특히 여러 사람이 함께 사용하는 공중화장실은 참기 힘든 악취와 여기저기 묻어있는 더러운 흔적들과 휴지들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화장실에 관한 이런 기억이 과거로 더 거슬러 올라가면 더 난감해진다. 재래식 화장실을 일컫는 소위 ‘푸세식’ 화장실은 강렬한 냄새는 그렇다 치더라도 “빨간 휴지 줄까, 파란 휴지 줄까”라고 외치며 갑자기 손이 밑에서 튀어나올 것 같은 괴기스러움까지 자아내기 때문이다. 화장실은 공포의 공간이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이 화장실에 ‘편하고’, ‘아름다운’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비데는 중산층의 필수품이 됐고, 사람의 움직임에 따라 작동하는 ‘똑똑한 변기’도 나왔다. 그리고 공중화장실도 깨끗한 바닥과 변기는 기본이고 향기로운 냄새와 각종 화분, 심지어 고상한 음악까지 흘러나온다. 이쯤되면 화장실이 아니라 무슨 휴식공간 같고, 잘 닦지 않는 책상보다 매일 청소하는 화장실 바닥이 더 깨끗하다는 말이 나올 정도이다. 화장실은 무엇에 쓰는 공간일까?
똥의 보편성
기억은 그리 좋지 않지만 사실 화장실은 누구에게나 평등하다. 피부색과 인종, 나이가 달라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먹고 싸야 한다. 왕이나 귀족, 재벌, 대통령이라도 똥을 싸지 않고 살 수 없고 그 점에서 왕과 노예는 동등하다. 아무리 호화롭고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그것이 똥으로 배출된다는 점에서 싸는 것은 평등하다.
해우소(解憂所)라는 화장실의 또 다른 이름도 그 평등함을 잘 말해준다. 똥을 싸지 못하는 근심을 이루 말로 다 설명할 수 있을까? 화장실을 찾지 못해 볼 일을 보지 못하는 고통을 겪어 본 사람이라면,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일이 급한 볼 일을 본 것이라는 왕의 고백에 동의할 것이다.
그래서 궁궐에도 화장실은 있어야 하고, 경복궁에도 화장실이 있었다. 홍순민의 『우리 궁궐 이야기』(청년사, 1999)에 따르면, 경복궁의 경훈각 서쪽 모퉁이에 달려 있는 자그마한 문을 열면 바퀴가 달린 판자 모양의 작은 수레가 있고 그것이 바로 왕의 요강을 담아내던 수레이다. “자료들에 따르면 경복궁에는 뒷간이 28군데 있었으며, 그 규모를 모두 합하면 51.5간이었다. 동궐에는 21군데, 36간 정도의 뒷간이 있었다”고 할 정도니 요소요소에 왕과 대신들의 근심을 풀 장소를 마련한 셈이다.
한국에서는 이처럼 왕의 근심을 세심하게 배려했지만 프랑스의 유명한 궁전에는 화장실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궁전에 들어가기 전에 미리 볼 일을 봐야 했고, 궁전의 정원을 장식한 수많은 조각품들은 감상용이 아니라 그런 볼 일을 보는 곳이었다. 여러 명이 조각품에 몸을 감추고 오줌을 누는 광경을 떠올리면 다소 엽기적이지만, 프랑스만이 아니라 유럽에서도 17세기까지 궁궐이나 독립건물에 화장실이 없었다고 한다. 집집마다 화장실이 설치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자본주의의 발달과 그 궤를 같이 했다.
만일 화장실에 없었다면 오줌과 똥은 어떻게 되었을까? 집집마다 병에 모아 아침이 되면 창에서 도로로 던졌다고 한다. 그래서 이런 똥벼락을 막기 위한 휴대품이 파라솔이고 길바닥의 똥들을 효과적으로 피하기 위한 신발이 하이힐이었다고 하니 이 또한 엽기적이다. 피하는 건 그렇게 한다 치더라도 그 냄새는 어찌 했을까?
어쨌거나 똥을 싸고 싶은 욕망은 누구에게나 평등하다. 똥을 싸지 못하면 사람은 죽는다.
똥과 노동
그런데 이런 보편적인 인류의 욕망을 가로막는 사회가 있으니 바로 한국 사회이다. 얼마 전 서울 지하철의 차장이 뒤따라오는 열차에 치여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 열차에 대해 잘 아는 차장이 왜 사고를 당했을까? 보도에 따르면 차장은 기관실에서 똥을 누다 선로에 떨어졌다고 한다. 그렇다면 왜 차장은 기관실에서 똥을 누려 했을까?
지하철을 운전하는 노동자들은 한번 운전대를 잡으면 열차가 순환되는 4시간 30분 동안 화장실을 갈 수 없다고 한다. 열차를 운전하는 노동자이기 이전에 사람으로서 그들도 똥을 싸야 하는데, 회사는 그들을 배려하지 않는다. 기관실이나 승강장 어느 곳에도 급한 일을 볼 공간이 없기 때문에, 지하철 노동자들은 기관실에 신문지를 깔고 용무를 해결해야 했다. 검은 비닐 봉투와 신문지, 빈 페트병이 운전대를 잡는 사람들의 필수품이라 한다(여성노동자들에게는 더욱더 곤욕스러운 상황일 것이다).
그런데도 회사가 이들을 배려한 것은 고작 ‘운전 전날 과식과 과음을 삼가라’는 말 뿐이었다니 참으로 열악한 노동조건이다. 지하철 노동자들만이 아니다. 할인마트에 하루 종일 서서 계산하는 노동자들도 손님이 밀리면 화장실에 가지 못한다. 버스를 운전하는 노동자들도 마찬가지다. 건설노동자들이 ‘식당에서 밥 먹고, 화장실에서 똥 싸고 싶다’며 파업을 벌이기도 한다.
이렇게 똥을 싸지 못하는 사람들의 어려운 사정은 비단 최근의 일이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자신의 몸을 불살라 한국 노동운동의 불씨를 피웠던 전태일 열사, 그의 동생인 전숙옥의 책 『끝나지 않은 시다의 노래』(한겨레신문사, 2004)를 보면, 1970년대 평화시장 미싱사의 삶도 그러했다. “먹고 난 후에 노동자들은 서둘러 화장실로 가는데, 그곳에는 어김없이 줄이 길게 늘어서 있다. 화장실이 남녀 공용인 데다 너무 적기 때문이다. 2,000명이 넘는 노동자가 일하는데 화장실은 겨우 3개. 물 공급도 빈약하기는 마찬가지다. 평화시장에 있는 400개의 작업장에 수도는 3개뿐이다. 손을 씻는 것은 고사하고 마시기에도 충분하지 않을 정도다. 화장실에 가려고 줄을 서는 시간이 그렇기 길지 않다면 점심식사 후 휴식을 취하거나 다른 동료 노동자들과 어울려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 텐데. 하지만 그것은 우리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우린 서둘러 작업에 복귀해야만 한다.”
그 때나 지금이나 열악한 노동환경은 인간의 보편적인 욕망을 가로막고 있다. 어떤 사회라도 사람이 똥을 제 때에 누지 못한다면 그 사회는 좋은 사회일 수 없다. 누구나 자신이 원할 때 편하게 화장실에 갈 수 있는 사회, 그 사회야말로 제대로 된 사회이다. 그러니 우리 사회가 좋은 사회가 되려면, “기관사가 똥을 싸야 하니 버스나 열차를 잠시 정차한다”는 안내방송이 나와야 한다. 화장실은 우리의 노동조건을 측정하는 중요한 잣대이다.
똥과 자원
화장실을 편하게 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도, 다른 한편에서는 아름다운 화장실 열풍이 불고 있다. 지금 한국의 화장실 열풍은 다른 나라에 알려질 만큼 혁명적인 변화를 겪고 있다. 외부에 알려진 ‘우주선 화장실’, ‘하늘 화장실’, ‘물레방아 화장실’ 등은 단순히 볼일만 보는 곳이 아니라 일종의 관광자원이 되고 있다. 심지어 2004년에는 ‘공중화장실 등에 관한 법률 시행규칙’이 제정되었고, 경기도를 비롯한 여러 지방자치단체들도 이런 관광자원을 개발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많은 돈을 쓰고 있다.
그리고 세계화장실기구(World Toilet Organization)가 있는데도, 한국이 주도해 세계화장실협회(World Toilet Association)가 만들어졌다. 이 협회는 화장실과 관련된 각종 정보와 기술을 교류하고 세계표준을 제정하며 수질오염 등 환경훼손에 따른 질병예방에도 힘쓴다고 한다. 삶의 질 향상을 위한 화장실 문화의 새 패러다임 확산, 인류가 직면한 물부족과 위생설비의 미비를 해결하기 위해 각 영역과 국가 단위의 긴밀한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것에도 기여한다고 하니 그 포부가 대단하다고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똥도 제대로 싸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 한국 사회에서 그런 주장은 좀 생뚱맞다. 그리고 이런 운동은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다. 바로 똥이 중요한 자원이라는 사실이다.
노동운동가에서 생태운동가로 변신한 박승옥은 『잔치가 끝나면 무엇을 먹고 살까』(녹색평론사, 2007)라는 책에서 똥이 곧 에너지라고 주장한다. “똥은 이렇게 불타고 남은 생명의 여분으로 유기물질이 풍부한 에너지원이다. 전통 농업사회에서 이 똥은 대부분 논이나 밭으로 돌아가 쌀과 같은 곡식이나 채소로 다시 우리몸속으로 돌아왔다. 또는 개나 돼지의 영양 만점식사로 제공되었다가 다시 양질의 개고기나 돼지고기로 돌아왔다. 자연에 폐기물이란 없다. 농업사회에서는 폐기물이란 개념은 없었다. 어떤 쓰레기라도 다 재활용되었고 생태계는 순환되었다. 그런데 산업사회가 시작되면서 사람은 폐기물을 만드는 이상한 종으로 변신해 버렸다.”
시기적으로 보면 집집마다 개인의 내밀한 화장실이 만들어진 것은 근대 자본주의 출현 이후이다. 그 전까지 똥은 버리는 쓰레기가 아니라 자원이었다. 그래서 옛날에는 똥을 버리는 사람에게 곤장을 치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렇게 소중하던 똥이 많은 물로 씻어내야 할 더러운 것으로 변했다.
자료에 따르면, 똥을 물로 씻는 수세식 화장실이 전국 화장실의 90%를 차지한다고 한다. 이 화장실에서 사용되는 물이 성인 한 명 당 하루에 평균 42리터, 생활용수 중 27%를 차지한다고 한다. 그리고 이렇게 모인 똥이 전국 191개 처리장에서 정화되고, 이런 분뇨처리장의 연간 운영비만 761억원, 그리고 장비를 교체, 수리하는 비용도 연간 300억이 든다고 한다. 한 때 인류의 가장 유용한 자원이었던 똥을 처리하기 위해 우리는 엄청난 양의 물을 소비하고 그 자원을 정화(?)하기 위해 1년에 천 억이 넘는 돈을 사용하고 있다. 이런 모순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사회적 양극화의 시대, 물과 석유가 부족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화장실은 아름다운 화장실이 아니라 누구나 편하게 찾을 수 있는 화장실, 그런 편함이 생태적인 에너지로 전환될 수 있는 화장실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