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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41
제목:한국에서의 비폭력 사회운동에 대해
조회:97

작성일:2008-02-28 14:09:34
수정일:2008-02-28 14:09:34

게시물주소: http://solidareco.ohpy.com/120977/41

글내용 본문

                         한국에서의 비폭력 사회운동에 대해


                                                                                                                                    정지석

 

저에게 맡겨진 역할이 이야기 마당에 이야기 거리를 내놓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생명평화결사의 교육위원장을 맡고 계신 황대권 선생님께서 간디의 비폭력 사상을 한국의 현실에 적용했을 때의 문제를 중심으로 해서 이야기 마당을 펼치고 싶다하시면서 세 가지 질문을 제게 던지셨습니다. 1) 한국에 과연 비폭력 평화운동이 가능한가? 2) 가능하다면 어떤 문제가 있는가? 3) 나의 수행과 사회행동과의 관계는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비폭력 평화운동이란 것이 개념 정리부터 시작해서 그 운동의 역사적 전개라든지 이런 것들을 말하자면 한이 없는 것인데 이렇게 이야기의 테두리를 쳐주시어 저의 생각을 정리하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평소 제가 생각했던 점들과 경험들을 바탕으로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 간디 비폭력 평화운동의 의미

인간의 사회 현실 속에서 폭력을 안 쓰고 산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라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 제기에서부터 이야기를 풀어갈 수도 있겠지만 본 이야기 마당에서는 간디의 비폭력 평화운동을 한국에서 사회운동으로 적용할 수 있는가라는 점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니 이론적이기 보다는 실천적인 이야기로 풀어보겠습니다.

사실 간디의 비폭력 평화운동이 출현하기 전까지 평화란 전쟁의 예방이나 종식에 관련된 정치적 이상이거나 전쟁과 물리적 폭력 사용을 거부한다는 극히 일부 각성된 종교인들의 개인적 신념과 태도를 표현하는 것이었습니다. 평화주의자들은 사회적 악이나 전쟁의 원인이 되는 빈곤이라든가 군사화 같은 사회문제를 어떻게 개혁하느냐는 문제에 대해서 속수무책이었습니다. 톨스토이 같은 평화주의자도 무력 사용을 절대 거부하는 무저항주의를 취하였을 뿐 평화를 사회운동으로 실천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간디는 비폭력 저항 운동을 전개하여 사회적 차별을 개선하고 민족을 독립시키는 일을 평화적으로 실천해 보였습니다. 소수 각성된 개인의 신념에서나 가능하다고 여겨졌던 평화의 이상을 사회 집단적으로 실천하고, 영국 제국의 통치로부터 인도의 독립을 무력수단이 아닌 비폭력 운동으로 성취해냈다는 점에서 간디 비폭력 운동은 전례 없는 일을 해 낸 것이고 또 평화운동과 사회운동에 일대 혁명적 전환을 제공한 것이었습니다.

앞서 간디의 비폭력 사상과 실천에 대해서는 발표가 있었기에 여기서 상세히 설명을 더할 필요는 없겠습니다만 한국 적용에 있어 몇 가지 생각해 볼 점은, 간디 같은 지도자가 있어야 비폭력 평화운동을 사회운동으로 실천할 수 있는 것이라는 주장은 한편으론 수긍할 수 있으나, 간디가 그리 특별한 능력을 타고났다거나 특수 지도자 훈련을 받은 것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고 봅니다.

다만 간디에게 특별한 점이라고 한다면 진리에 대한 신념과 사회적 불평등과 차별을 개혁하고자하는 의지가 남달랐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을 궁극적으로는 자아실현을 위한 것으로서 자신의 삶에 지극한 충실성을 보였다는 점입니다. 그의 비폭력 운동은 하나님께 복종하는 마음으로 진리를 따르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돕는 봉사정신을 실천한 것입니다. 진리운동을 한다면서 폭력을 사용할 수 없는 것은 자연스런 귀결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비폭력 행동은 진리를 따르고자하는 복종 행위의 결과인 것입니다. 우리가 간디 비폭력 평화운동에서 비폭력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은 나무를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우를 범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비폭력을 사회운동의 전략으로 삼는 사람들은 이런 점에서 간디의 비폭력 운동의 형식만을 취하는 태도라 할 것입니다.

2. 한국에 비폭력 평화 운동이 가능한가?

한국에서 비폭력 평화운동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저는 이미 한국 사회운동은 비폭력 평화운동이었다고 대답하고 싶습니다. 일례로 한국 민주화 운동은 비폭력 평화 운동이었습니다. 광주에서의 유혈을 겪었지만 6.10 민주화 운동은 비폭력 평화운동으로 민주화를 성취한 세계사적 기념비가 될 만한 것이었습니다. 한국에도 간디와 같은 분이 있었습니다. 한국의 간디라 불리우는 함석헌입니다. 간디만큼 조직적이고 실용적인 사회운동가는 아니었을지라도 간디와 같이 종교적 진리의 구도자요 투철한 비폭력 평화 사상가로서 함석헌은 한국 민주화 운동이 비폭력 평화운동으로 나아가는데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비폭력평화 사상을 사회운동으로 실천하기위해서는 간디와 함석헌 같은 투철한 지도자가 많이 나와야 할 것 같습니다.

비폭력평화운동의 가능성을 묻는 것은 과연 그것이 사회운동의 성과란 면에서 얼마나 유효한가, 다른 한편으로는 비폭력 평화운동이라 하면 도덕적으로 높은 의식수준과 깨달음이 있어야만 할 수 있는 운동이기에 일반 대중들의 운동이 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내포한 것이라 봅니다. 사회 구조 악과 폭력을 비폭력 평화운동으로 대응할 수 있겠는가, 물리적 힘이 아닌 양심의 호소와 비협조 같은 비폭력적 방법으로 사회악을 변혁시켜낼 수 있겠는가, 대항폭력, 자위폭력, 개혁폭력은 불완전한 인간현존에서는 불가피하고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닌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비폭력을 수행한다는 것이 인간의 오만을 부채질하는 것은 아닌가. 비폭력 평화운동이 이런 정당한 폭력까지 용납하지 못한다면 너무 교조적인 원리원칙주의에 빠지는 것은 아닌가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최근 노동자 농민들의 생존권 투쟁이나 평택 미국기지 반대 투쟁이 폭력시위로 언론의 질타를 받는 것은 자위적 대항 폭력인 경우가 많습니다. 소위 국가의 공권력이 폭력적으로 진압을 먼저 시도하는 것이 상례입니다. 그래서 대중들의 자연적인 대응 폭력을 유발시키는 시도를 한다고 봅니다. 폭력적 충돌이 생기면 국가 경찰의 폭력은 합법적인 공권력 행사가 되며 시위대의 폭력은 불법적인 폭력이 됩니다. 시민의 부상은 책임지는 사람이 없지만 경찰의 부상은 폭행으로 체포됩니다. 폭력시위로 언론의 떠들썩한 질타를 받은 평택미군기지반대 운동에 참여했다가 경찰에 연행 당했던 분에게서 직접 증언을 받은 것인데 좀 길지만 인용해 봅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사실은 경찰입니다. 지난번에 평택에서의 폭력사태는 따지고 말하면 순전히 경찰 측에서 고의적으로 먼저 시비를 건 것입니다. 평화적으로 시위하려고 서 있는 시민들을 경찰 윗선에서 그런 식으로 문제가 되도록 처음부터 시비를 겁니다. 그게 그들의 수법입니다. 자연히 조중동의 여론은 그들의 소리를 대변하게 되어 있지요. 처음부터 폭력적 수단을 준비했던 것은 아닌데, 경찰이 폭력적으로 나오니까 자기 방어에서 비닐하우스에 있던 막대기들을 드는 예가 있었습니다. 하여간 평택에서의 집회는 언제나 어린이들과 여성들이 많은 자리를 차지하는 평화적 시위였다는 것이 제가 충분히 증언할 수 있는 얘기입니다. 제가 체포될 때에도 경찰병력은 최소 500명 이상이었고 이쪽 평화지킴이들은 50여명 정도였지요. 비폭력적인 방법 외에는 다른 방법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지금도 재판중이지만, 조서에는 각목이 등장하고 돌멩이가 나오고 짚단에 불을 붙였다고 하는 과격한 문구들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그 자리는 논바닥이었기에 돌도 없었고 각목도 없었고 짚단도 없었지요. 그리곤 아무런 예고 없이 그냥 서 있던 사람을 한사람씩 연행해간 것입니다. 결론으로 말하면 간디의 비폭력은 인도의 종교적 영성이 바탕이 되었다고 보고, 킹목사의 비폭력저항 또한 그만한 흑인들의 종교적 영성이 마련되어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우리 남한은 지금도 여전히 80년대의 폭력적 거리시위에 대한 기억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것과 쌍방의 마음들이 민족구성원 전체의 마음들이 일제시대와 남북분단을 비롯한 100년의 파행적인 민족 역사로 모두 거칠대로 거칠어졌다는 것입니다.”

불의한 국가 폭력에 당하더라도 사회운동은 비폭력 평화 입장을 고수해야한다는 것이 이 분의 주장입니다. 저 역시 동감입니다. 그러나 이런 의견은 사회운동 진영에서도 소수 의견인 듯합니다. 당시 평택의 폭력 시위에 대한 여론이 나쁘게 돌아갈 때 모였던 사회운동가들의 토론 모임에서 국가공권력의 태도에 상관없이 시민단체는 비폭력 평화 원칙을 고수해야 한다는 주장은 소수 의견이었습니다. 부당하게 당하면서 비폭력을 고수하는 것은 바보같은 짓이라는 의견이 다수였습니다. 오늘 이야기 마당에서 여러분들의 의견은 어떤지 듣고 싶습니다.

3. 비폭력 평화운동은 시대적 명령이요 의무이다

저는 비폭력 평화 운동은 가능해서 하고 불가능하다고 안할 문제가 아니라 현 시대와 미래를 위해서 반드시 실천해야 할 운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필요성을 두 가지 차원에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는 비폭력 평화운동이 단순히 물리적 폭력사용을 안한다는 소극적인 입장에서가 아니라 생명을 보전할 수 있는 적극적인 대안문명을 만들어가는 운동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운동의 내적 갱신을 위한 길로서 비폭력 평화 운동의 의미입니다. 후자는 뒤에 ‘나의 수행과 사회운동간의 관계’에서 좀 더 자세히 말씀드리도록 할 것입니다.

현재 우리들의 삶은 어디 일부분에서 폭력의 문제를 다룰 수 있는 정도가 아니라 가히 총체적이라 할 만큼 폭력에 둘러싸여있다고 봅니다. 저는 이 근본원인을 20세기에 들어와 급속한 경제 성장 중심의 문명이 끼친 폭력성에서 찾고 싶습니다. 이 경제성장 문명은 사람의 마음에서부터 사회와 국가, 그리고 지구 생태계까지 전방위적으로 심각하게 파괴시켜왔습니다. 우리 한국 사회를 보아도 그 폭력성은 깊이 침투해 있습니다.

군사독재권력의 주도아래 급속한 경제성장을 거치면서 사람들의 마음이 매우 급해지고 거칠어지고 사나와졌습니다. 먹고살기는 예전보다 몇 백배 나아졌지만 인심은 각박해지고, 사람살기가 무서워졌다고 합니다. 이건 막연한 느낌만은 아닙니다. 일례로 아시아에서 한국인에 대한 인식이 아주 안 좋습니다. 여행객들의 무도한 행동, 아시아에 진출한 한국 하청 공장주들의 현지 노동자들에 대한 비인도적 처우, 국내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인권 유린은 심각합니다.

우리 사회 내부를 들여다보아도 어디서나 순위를 다투는 치열한 경쟁문화에서부터 영상 매체들의 폭력 신드롬, 조폭 문화, 그리고 청소년 폭력에 이르기까지 사회 전 분야에 폭력이 만연하고 있습니다. 일례로, 청소년 폭력의 대처 방안으로 학교경찰제를 도입하는 것은 폭력을 더 강한 폭력으로 해결한다는 사고방식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한국 사회의 폭력성은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서부터 모든 가치 판단 기준을 경제적 실익에 두는 생활과 마음의 습관이 낳은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현실에서는 민주주의의 본질은 실종되고 오직 개인과 집단의 경제적 욕망을 만끽하는 도구로서의 민주주의로 전락하고 맙니다. 최근 군부대가 이천에 이주하려다 주민들의 반대에 부닥치자 막대한 보상금으로 문제를 해결 했습니다. 제주도에 들어서는 해군기지건설문제도 결국 돈으로 밀어붙이고 있습니다. 주민의 민주주의적 권리 운동은 돈의 위력 앞에서 방향을 상실하고 있습니다.

국가안보와 지역주민의 안보(삶의 가치와 행복추구), 군사기지에 대한 근본적 문제제기 같은 가치에 대한 토론은 실종되었습니다. 오직 효율성, 경제적 실익 같은 본능적 욕구 충족에 민중의식을 노예화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사회운동이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정작 주민들 간의 분열과 갈등은 심화되고 삶은 황폐화 되고 있습니다. 정치권력의 폭력보다 경제권력(돈)의 폭력이 사람과 사회를 더 해롭게 파괴시키고 분열을 깊게 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 점을 비폭력 평화운동은 보다 깊게 성찰하고 문제 해결의 길을 찾아야 한다고 봅니다. 비폭력 평화운동은 민중의 실질적인 고통을 해결하는 실용적인 사회개혁 운동을 추진하면서 동시에 근본적이고 전체적인 변혁을 기획하는 운동이 되는 이유가 여기 있다고 봅니다.

이번에 새 대통령과 정부가 내 세우는 것이 경제 실용주의 노선입니다. 기존 정부의 노선을 이념 이상주의라고 규정하고 대립각으로 내세운 것이라 합니다. 경제적 성장과 실익을 중시하는 새 정부의 경제 실용주의는 사회적 갈등과 폭력을 한층 증가시키리라 예상됩니다. 공자 말씀에도 ‘이익을 위해 행동하면 원망이 많다’(放於利而行 多怨)고 했습니다. 경제적 실용주의는 인간의 욕망을 최대한 조장하는 논리이기에 가족, 인간관계는 물론이고 사회집단간 분열과 충돌을 한층 심화시킬 것입니다.

사회적 소수자와 약자에 대한 폭력 또한 크게 늘어날 것입니다. 경제적 이익을 위해서는 자연 생태계에 대한 무차별적 폭력도 가해질 계획인데 한반도 대운하 건설 사업은 벌써부터 충돌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비폭력평화 운동은 물리적 힘의 사용문제를 넘어 생명을 살리는 보다 적극적이고 건설적인 대안적 삶의 길을 창조하는 운동으로 그 비전과 운동방향을 설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간디의 비폭력 생명평화 운동은 소극적 폭력 사용거부에 그치지 않고 늘 대안적 삶의 길을 찾았던 건설적인 평화운동이었습니다.

함석헌도 비폭력 평화운동을 궁극적으로는 새 사람, 새 사회를 탄생시키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저는 오늘 한국의 정치적 현실에서 비폭력 평화운동은 경제 실용주의와 이념 이상주의를 모두 지양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빵과 이념으로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진리와 양심에 바탕을 두지 못한 빵과 이념은 오히려 해악일 뿐임을 지난 세기 인류가 경험하고 깨달은 교훈입니다. 비폭력 평화운동은 진리와 양심의 바탕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폭력 평화사상을 토대로 하는 사회운동은 진리와 양심이라는 인간의 보편적 도덕성 위에 민중의 실생활에 유익을 주는 도덕적 실용주의를 추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권, 생태계, 평화는 도덕적 실용주의의 핵심 내용이 될 것입니다.

4. 비폭력 평화운동의 문제?

현단계 한국에서 비폭력 평화운동의 과제는 남북한의 오랜 폭력적 대결을 종식시키고, 사회에 만연한 폭력 문화를 평화의 문화로 바꾸는 큰 작업에서부터, 가족과 운동조직 안의 동료들과의 관계를 평화롭게 조성하는 일상적인 일까지 모두 포함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오늘의 우리 사회는 비폭력평화 운동을 시급히 요청하는 시대에 와 있다고 봅니다.

어떻게 할 것인가? 먼저 비폭력 평화운동을 하겠다는 분명한 선언을 하고 신념을 갖는 태도형성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단순히 운동 전략의 하나로 삼는 것보다 좀 더 깊고 투철한 사상을 갖는 것이 요청됩니다. 유연한 태도는 비폭력 평화운동의 핵심입니다. 비폭력 평화사상은 주의주장이 아닙니다. 신념과 도그마는 구별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신념은 내적으로 규정되는 힘이라면 도그마는 외적으로 부여되는 강제적 힘으로서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의 행동까지 구속합니다. 비폭력 평화운동은 도그마처럼 되어서는 힘이 나오지 않습니다. 간디 비폭력운동에서 우리가 배운 점은 비폭력은 내적 신념의 힘에서 자발적으로 나올 때 진정한 위력을 발휘한다는 것 입니다. 우리가 비폭력 평화운동을 천명한다는 것이 자칫 도그마가 되어서 활기를 죽이고, 타인을 정죄하며, 스스로 위선자가 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봅니다.

한국에서 비폭력 평화운동이 과연 대중운동으로 전개될 수 있는 것인가라는 문제도 이야기될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저는 충분히 가능하고 이미 한국 사회에서 실현되어 왔다고 봅니다. 여기서 보다 중요한 문제는 사회운동 지도자들의 비폭력 평화운동에 대한 신념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회운동이 폭력화되느냐 아니냐는 다양한 상황변수들- 조작, 왜곡, 순간적인 감정, 예상치 못한 돌발 상황 등, 여러 요인이 작용하여 결정되므로 대중들의 자연스런 의지에 맡겨둘 수 없다고 봅니다.

간디는 스스로 비폭력 운동에 대한 신념을 굳게 다졌고, 대중들에게 비폭력 훈련과 교육을 시켰으며, 비폭력행동 서약을 하도록 했습니다. 이를 하지 않은 사람은 행동에 참가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사회운동이 비폭력평화운동으로 실현되기 위해서는 비폭력 대중교육과 훈련은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사회운동 현장에 임할 때 지도부가 분명한 비폭력 평화 행동 원칙을 제시하고 스스로 이를 준수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6.10 민주화 운동은 이런 원칙을 잘 지킨 사례였다고 봅니다. 간단하고 쉬운 구호, 화염병 등 일체의 폭력 대응(도구 사용)금지 원칙을 천명했습니다. 시위대는 최루탄을 쏘면 흩어졌다 다시 모이고 전경이 달려들면 도망가고, 그리고 시위대에 갇혔던 전경들은 풀어줬습니다. 시위대들이 준비한 도구는 치약, 마스크, 손수건등뿐이었습니다. 마치 축제처럼 진행되는 민주화 시위를 회사 건물에서 지켜보던 회사원들이 퇴근 후 참가하기 시작했습니다.

비록 최루탄이 매웠지만 그날은 마치 시민들의 축제날 같았다고 기억합니다. 비폭력평화 운동은 많은 일반 시민들이 부담 없이 쉽게, 스스로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에 자발적으로 나설 수 있는 운동임을 확인할 수 있는 경험이었습니다. 일제강점하의 망국기에 무력저항으로 나라를 지키고자했던 의병운동은 주로 비분강개했던 선비집단이 주도했다면, 단순히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불렀던 3.1운동은 학생, 장사꾼, 농민 등 일반 민중이 주체였습니다. 비폭력 평화운동은 선각자들의 운동이 아니라 오히려 민중이 주인이 되는 운동임을 3.1운동은 증명해 줍니다.

그러므로 비폭력평화운동은 큰 깨우침을 얻은 성자들이나 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훈련과 교육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대중들을 다 교육하고 훈련할 수 없다면 적어도 사회운동가들은 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래서 사회운동을 새롭게 하고 나 자신을 새롭게 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봅니다. 한국사회에서는 사회운동이 정치, 경제, 사회의 권력을 상대로 하다보니까 자신도 모르게 권력의 생리를 닮아가는 모습도 보입니다.

싸우면서 닮아간다는 말을 실감합니다. 요즘 민주개혁진영의 패배, 신뢰감 상실, 무기력 등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시작되는 듯합니다만, 아마도 그 근본 원인은 권력과 싸우면서 권력의 위력을 체득한 습관이 개혁행동을 구태의연하게 만들었고 시민들의 기대를 저버리게 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상대적으로 보면 예전 독재권력보다는 훨씬 진보된 개혁을 이뤘지만 말입니다.

비폭력 평화 사상을 국가의 운영이란 차원에서, 정치현실주의 속에서 실현한다는 일이 과연 가능한 일인가는 또 다른 토론을 해야 할 문제라고 봅니다만, 저는 노무현 정부에서 기성 정치권력과는 다른 행태를 느낀 적이 있습니다. 일관된 모습은 아니었지만, 대통령이 권력정치보다는 대화와 토론의 정치를 구하고, 적(야당)과의 동반 협력 정치를 제안하는 등의 시도는 기존 정치에서는 생각키 어려운 일이었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런 시도들이 야당의 주장대로 다만 정치적 술수였는지는 모르지만, 대통령의 평화정치의 시도는 무능력으로 결론지어졌습니다.

도올 김용옥은 신상필벌책을 치국의 원리로 주문하면서 권위를 세우라고 했지만 그리 용이주도하게 실행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노대통령의 기본정치 철학이 국가권력을 이용하여 적대자를 응징하거나 억압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대화와 토론을 하자는 태도, 야당과 권력을 나누려는 제안과 시도 등은 비록 현단계 한국 정치 수준에서는 이른 것이었지만 비폭력평화 사상을 정치 현실주의에서 적용해 본 의미 있는 일이었다고 봅니다.

선거에서는 번번이 대패하였다고 이런 시도가 무의미하거나 실패했다고 판정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권력이면 만사형통하던 기존의 권력만능주의와 부정부패의 만연함은 많이 벗겨내지 않았나 싶습니다. 권력만능, 부정부패는 폭력의 다른 이름입니다. 오늘 우리 이야기 마당은 정치권력을 이야기하는 것이기보다는 사회운동과의 관련 속에서 비폭력 평화운동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주로 이야기 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치권력을 닮아가는 사회운동권력이 어떻게 도덕성을 회복하고 유지하는냐는 점이 우리가 좀 더 이야기하고 생각해 볼 점이라고 봅니다.

최근 사회운동 집단의 정치 권력화 흐름은 비폭력 평화운동의 관점에서는 어떻게 볼 수 있는지, 비폭력 평화 사상으로 정치권력을 개혁하는 일은 어떤 것인지, 돈의 힘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 것인지, 사회 전반에 만연된 폭력의 문화를 바꿔내는 비폭력 평화운동은 어떤 기획을 필요로 하는 것인지를 오늘 이야기 마당에서 듣고 싶습니다.

5. 폭력을 넘어서는 길

만연한 폭력 문화를 극복하는 길은 무엇인가? 적극적 평화 운동을 전개하는 길밖에 없다고 봅니다. 폭력과 맞붙여 싸우기보다는 평화를 만들고 삶으로서 새로운 삶의 길을 내는 것이 비폭력 평화운동의 폭력 대응법이라 생각해 봅니다. 이것이 ‘악에 저항하지 말라’는 예수의 산상수훈 가르침의 진의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폭력은 더 큰 폭력으로 잡아야 한다는 게 정치 현실주의식의 해결법입니다. 그러나 이런 정치 현실주의식의 해결법은 언제나 민중의 희생을 초래했습니다. 그 예를 저는 광주시민들의 희생에서 봅니다. 박정희 군사독재는 민주화 운동의 결실로 끝내야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독재의 폭력성은 내부 폭력에 의해 종식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또 다른 폭력을 예비한 과정일 뿐이었습니다. 르네 지라(Rene Girard)라는 폭력 연구가는 폭력은 모방과 반복 과정을 통해 증식되는 생리적 특성을 갖고 있음을 발견한 바 있는데, 우리도 역시 이 폭력논리를 우리 역사 경험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즉, 폭력은 폭력에 의해 종식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증식되어간다는 것을 10.26에서 12.12를 거쳐 5. 18의 이어지는 역사적 과정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저는 유럽의 대표적인 폭력 갈등지역인 북아일랜드에서 화해과정을 지켜본 적이 있습니다. 사백여년동안 카톨릭 아일리쉬와 개신교 영국계간의 민족적 종교적 갈등의 역사를 배경으로 하면서 짧게는 최근세기 30여 년 동안 같은 지역사회 안의 두 대립 집단이 얼굴을 맞대고 살면서 상호 폭력 테러로 4천여 명이 희생당하는 폭력 갈등이 일어난 곳이 북아일랜드입니다.

천신만고 끝에 정치적 평화협상이 성사되고 테러 폭력이 종식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다가 다시 방문하여(2006년 11월) 그곳 평화교육가로부터 새로운 상황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곳의 주된 폭력이었던 정치적 종교적 폭력은 종식되고 있지만 새로운 사회적 폭력이 생겨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서로 상대방을 향하던 폭력이 자기 집단 내부의 약자를 향하고, 또 아일리쉬와 영국계가 공히 다른 인종, 예를 들면 주요 타겟으로 중국계 주민을 향한 폭력이 빈발해지고 있다는 겁니다.

저는 이 소식을 들으면서 폭력 바이러스를 생각했습니다. 한번 형성되면 없어지지 않고 자기 변이를 계속하면서 약한 쪽으로 흘러들어가 새로운 병을 만들어내는 치명적인 바이러스처럼 한 사회 안에 형성되어있는 폭력도 새로운 대상을 찾는데 주로 사회적 약자가 곧 대상이 삼는다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에게 폭력에 대응하는 방식에서 생각할 점을 제공한다고 봅니다.

북아일랜드에서 폭력 종식은 폭력에 대한 상호위기의식과 증오, 영국과 아일랜드 정부를 비롯한 미국, 유럽연합 등의 국제사회의 압력에 따라 정치적 타협으로 진행된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폭력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은 결여된 정치적 과정이었습니다. 바이러스 병을 치료하는데 보다 근본적인 기초체력을 다지고 생활습관을 바꾸지 않고 투약 주사로만 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 하겠습니다.

기초체력을 다지고 생활습관을 바꾸는 일은 사회적 평화문화를 든든히 세워나가는 일과 같은 것입니다. 북아일랜드의 새로운 폭력 상황을 보면서 저는 사회적 폭력을 극복하는 길은 오직 비폭력 평화의 문화를 건설하는 사회혁명의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여기에 비폭력 평화운동이 사회운동으로 실천되어야하는 의미와 당위성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비록 그 길이 지난하고 미개척의 불가능해 보이는 길일지라도 가야할 길이라고 믿습니다.

우리나라도 전쟁 후 반세기 이상 지속돼 온 남북한 간의 정치 군사적 갈등, 군사문화, 앞에서도 언급한바와 같이 짧은 기간 동안의 경제적 고속성장과정에서 형성된 심리적 사회적 폭력성, 대립과 투쟁에서 빚어진 폭력의 문화는 참으로 사회깊이 뿌리 내리고 있습니다. 특히 마음 속 깊이 폭력의 습관이 일상화되어 있습니다.

한국에서 비폭력 평화운동은 이런 전체 삶과 문명적 관점에서 풀어가야 한다고 보며 이를 위해서 이전과는 다른 운동기획과 교육 활동 그리고 자체 갱신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고 봅니다. 탈냉전 시대에 들어와 신사회운동의 특징은 적이 없는 투쟁, 그래서 필연적으로 자기 갱신을 요청하는 운동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점은 수행과 사회운동이 불가분리의 관계를 맺어야 하는 일과 관련됩니다.

6. 나의 수행과 사회행동

사회운동가들이 종교적 수행에 참여하거나 조직 생활에 적용하는 노력들이 심심찮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또 거꾸로 종교적 수행자들이 사회운동에 참여하는 흐름도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습니다. 삼보일배, 일인시위, 생명평화탁발순례같은 것은 수도자의 수행법이 그대로 사회운동의 실천으로 결합된 것이라 하겠습니다.

폭력문명이 그만큼 인간과 사회의 골수 깊이 뿌리박혀 있다는 위기적 각성을 반영하는 현상이라고 볼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론 새로운 생명문명을 만들려는 바람직한 움직임이 시작되고 있다는 표징 같기도 합니다. 이런 새로운 움직임은 분명 바람직한 것입니다. 사회적 실천 현장은 인간의 욕망과 이기심이 부닥치고, 사회를 개혁하겠다고 나섰다가도 통칭 사회 구조악이라 일컬어지는 제도적 모순과 사회적 악폐의 아우라 속에 갇히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문득문득 자신의 현존을 묻는 내적 음성을 듣게 되며, 현장과 일에서 떨어져서 자기 성찰과 정리의 시간을 갈망하게 됩니다. 도대체 나는 누구이며, 내가 하고 있는 일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이게 아닌데, 지금의 내 모습을 보면 이게 아닌데 하는 자괴감을 갖게 됩니다. 생명 평화운동을 한다면서 가까운 가족과 동료들과는 늘 갈등하고, 온갖 마음의 욕망과 증오와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는 모순 속에서 나는 과연 누구이며, 내가 하는 일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를 고민합니다.

조직문화를 바꿔야 하는 건지 나 자신부터 바꿔야 하는 건지, 둘 모두를 동시에 바꾸는 길은 무엇인지, 요즘 정부 기업등지에서도 혁신이란 말이 유행이지만, 사회를 혁신한다는 사회운동 단체와 실무자의 혁신의 길은 묘연합니다. 요즘 만나는 시민사회단체 실무자들 가운데 3년 정도 이상 된 이들은 거의 모두 이런 고뇌를 토로합니다. 저 역시 유사한 경험을 갖고 있기에 그 고뇌가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3년 정도 일해 보면 일도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비슷한 일들도 일 년 계획이 잡히기 때문에 새로이 생각할 것도 없고 또 새로운 아이디어를 낸다는 것도 다른 부서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직간접으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자칫 조직 내에서 왕따를 당하기 십상입니다. 자신의 변화만큼 조직이 함께 바뀌어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습니다. 조직은 관료화되어가고 운동은 타성에 젖게 되며 그곳에서 일하는 의미를 잃고 무기력해집니다.

그래서 사회운동의 영성회복이 필요하다는 말이 많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나의 수행과 사회운동 간의 관계도 이런 맥락에서 제기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비폭력평화운동은 사회운동의 혁신을 위한 기본 방향과 철학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느냐고 합니다만 결국 비폭력 평화운동을 선언하고 해야겠다고 결심하는 일이 중요하고 그다음부터는 이를 몸소 체득해가는 길 이외에 다른 길이 없을 것입니다.

비폭력평화운동은 본질적으로 자기수행과 사회적 실천이 뗄래야 뗄 수가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간디도 궁극적으로 소망했던 것은 자아실현이었습니다. 비폭력 평화운동은 사회운동을 자아실현의 기회로 삼고, 이를 위한 개인적 수행을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수행은 멀리 은둔하여 홀로 정신적 각성을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공동체 봉사에서 표현되고, 주변 동료들과 관계를 새로이 하며, 차이를 기뻐하고 소통하는 법을 체득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를 둘러싼 폭력의 일상은 오히려 비폭력 평화 수행의 적지가 될 것입니다.

끝으로 사회운동에서 개인 수행을 강조하는 이들이 단체 안에서 겪는 문제들을 보면서 저 또한 풀리지 않은 숙제로 남아있는 이야기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한 생명평화운동 단체에서 개인 수행을 강조하는 사람들과 이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가진 사람들 즉, 운동성을 강조하는 사람들 간에 깊은 골이 패여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기대하는 이상형은 둘의 조화가 이뤄져야하는 것인데 현실적으로는 두 흐름 간에 갈등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현실 속에서는 조화를 이룰 수 없는 것인지, 조화를 이루는 길이 있다면 어떤 것인지 오늘 이 자리에서 지혜를 얻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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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지석 선생님은 아일랜드 트리니티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영국 선더랜드 대학(우드부록 퀘이커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셨으며 전공은 ‘평화신학’입니다. 주요경력으로는 크리스챤 아카데미 사회교육원 평화교육 부장과 유네스코 아태 국제이해교육원(APCEIU) 국제부장을 지냈으며, 현재 성공회 대학에 출강하시며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정의평화위원회 위원과 한국기독교평화연구소 소장을 역임하고 있습니다. 대표 저서로는 <함석헌의 철학과 사상: 씨알 생명 평화> (한길사, 2007)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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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생명평화 결사}의 교육위원회가 1월25~27일 개최한 [2008 겨울 생명평화 학교]에서 필자가 발표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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