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닷길로 물밀듯 침투한 ‘정복자의 언어’ | |
| 주경철 교수의 문명과 바다 20. 언어의 확산과 사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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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월 21일, 알래스카의 앵커리지에서 마리 스미스 존스 할머니가 89살로 운명했다. 이 할머니는 이 세상에 마지막 남은 순수 혈통의 에약(Eyak)족 사람이자 에약 언어를 유창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이제 지구상에 이 언어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게 되었고, 에약어는 멸종 언어가 되었다. 존스 할머니는 슬하에 자녀 9명을 두었고 그 중 7명이 생존해 있지만, 영어 이외의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데 대해 압박이 심했던 시대에 살았던 터라 그 중 한 명도 에약어를 배우지 못 했다. 에약어 외에도 약 20개의 알래스카 토착어들이 이처럼 멸종 위기에 놓여 있다. 그러나 어디 알래스카뿐이랴. 현재 약 6천~7천 개 정도 존재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세계의 모든 언어 가운데 약 절반 정도가 금세기 중에 사라질 것이라고 추측하는 학자도 있다.
세계 인구의 절반이 12개의 주요 언어를 사용하고, 나머지 수천 개의 언어는 사용자가 5천명도 안된다. 이처럼 불균형한 언어 분포의 분기점은 근대초 해양팽창이다. 남북 아메리카에선 토착어가 사라졌고 에스파냐어와 포르투갈어, 영어가 공영어가 되었다
오늘날의 이런 언어 분포 상태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중요한 분기점은 분명 근대 초의 해양 팽창일 것이다. 대항해시대에 전 지구적인 차원에서 일어난 대규모 인간 접촉은 실로 복잡한 언어 현상을 유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시기에 무엇보다도 많은 유럽 언어들이 세계 각 지역으로 퍼져갔다. 언어 확산의 동력은 무엇일까? 앞에서 언급한 12개의 중요 언어들을 보면 크게 두 종류로 나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는 원래 그 언어를 사용하는 인구 자체가 많은 경우이다. 중국어가 대표적인데, 이런 언어들은 중심지에 거대한 인구 집단이 있고 이들이 주변 지역으로 확산되는 방식으로 퍼져갔다. 다른 하나는 원격지로 언어가 팽창해 간 경우로서, 아랍어, 영어, 에스파냐어, 포르투갈어 등이 이에 해당한다. 근대 세계의 언어 분포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은 이 가운데 두 번째 방식이다.
중국어나 힌디어같이 근대 이전에 크게 확산된 언어는 문자를 통한 교양문화나 종교 등이 그 언어가 확산되는 주요 동력이었다. 이처럼 육지를 통해 이루어지는 언어의 확산은 속도와 범위가 상대적으로 느릴 수밖에 없다. 이에 비해 대항해시대에 유럽 언어들이 확산된 방식은 근본적으로 달랐다. 바다를 통해 언중(言衆)이 팽창하는 시대가 되자 일부 언어들은 대륙 단위로 급속히 퍼져갔으며, 그 방식은 무력에 근거한 소위 ‘침투(infiltration)’ 방식이었다. 그것은 비교적 소수의 사람들이 정복을 통해 해외에 지배적인 공동체를 형성한 후 이로부터 광범위한 피지배민 층으로 정복자의 언어가 확산되는 방식을 말한다. 그 다음 2차적으로 19세기 이후에 유럽인들의 대규모 이민을 통해 앞 시대에 형성된 유럽 언어들의 지배력이 확고하게 굳어진 것이다.
이처럼 세계 언어의 판도가 형성된 이면에는 근대 세계의 역사가 작용하였고 다름 아닌 힘의 관계가 투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예컨대 오늘날 포르투갈어는 포르투갈 국내보다도 해외에서 사용하는 인구가 훨씬 많은데 이는 물론 브라질이라는 거대한 국가가 과거에 포르투갈의 식민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예외가 없지 않아서, 네덜란드는 유럽의 주요 식민 세력 가운데 하나였으나 오늘날 네덜란드어는 세계 주요 언어 목록에 이름을 올리지는 못한다. 다른 유럽 국가들의 경우 어떤 지역을 식민지로 삼으면 그 언어의 영향이 대단히 강하게 남는데 네덜란드는 그렇지 않다. 예컨대 인도네시아에는 탈식민화 이후 오늘날 네덜란드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 이는 네덜란드 제국주의의 중요한 특징으로 보이며, 흥미로운 비교 연구 주제가 될 것이다. 우리가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영어의 세계적 확산이다. 영어는 현재 제1언어로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보다 제2언어로 사용하는 사람의 수가 더 많다는 특징을 보인다. 그만큼 이 언어가 전 세계로 널리 보급되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영국 제국주의를 연구한 학자 퍼거슨에 의하면 영어는 “어쩌면 지난 300년 동안의 단일 수출품 가운데 가장 중요한 품목일지 모른다. 오늘날 3억 5000만명의 사람들이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며 약 4억5000만명이 제2외국어로 영어를 사용한다. 이는 지구상에 살고 있는 사람 일곱 명에 한 명꼴이다.” 영어는 그야말로 잉글랜드의 언어에서 세계의 언어로 변화한 것이다.
세계 언어들은 장차 어떤 변화를 겪을 것인가? 영어는 계속 다른 언어들을 구축해 가며 세를 불릴 것인가? 에약어가 멸종되듯이 한국어도 사라져서 백 년 뒤에는 한반도에서도 영어를 말하며 살게 될까? 이런 문제들에 대해 누구도 명확하게 답할 수는 없지만, 역설적인 점 하나는 영어가 널리 확산되면서 오히려 영어 자체가 사라지거나 크게 변화될 가능성도 있다는 점이다. 전문가들에 의하면 지난 날 라틴어가 그랬던 것처럼 영어가 여러 개의 개별 언어로 분화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고 한다. 라틴어는 로마제국이라는 지지대가 사라지자 사멸하고 그 대신 몇 개의 로만스 언어(불어, 이탈리아어, 에스파냐어 등)로 분화되었다.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의 지지와 영어의 보편화는 로마 제국과 라틴어의 관계와 유사해 보인다. 물론 그것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마지막 에약어 사용자였던 존스 할머니의 본래 이름은 우다치 쿠칵스아아치(Udach' Kuqax*a'a'ch)로서 그 뜻은 “멀리서 사람들을 부르는 소리”라고 한다. 평생 대화할 사람이 없어서 외롭게 살았다는 우다치 쿠칵스아아치 할머니가 저 세상에서 이름 그대로 옛 친구들을 소리 높여 불러서 에약어로 반갑게 대화하시기를 빌어본다.
주경철 서울대 교수·서양사 | ||||||||||||||||||||||||||||||







